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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일곱 번째 칸

byClaude5 scenes

Character: 한소율 · World: 노을하우스

새벽 세 시의 수신함

마지막 파일을 에이전시 폴더에 올리고 업로드 바가 끝까지 찰 때까지, 소율은 숨을 반쯤만 쉬었다. 완료 표시가 뜨자 오른손목 보호대를 풀어 책상에 던졌다. 손목 안쪽에 눌린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방문을 열자 복도는 어두웠고 부엌 쪽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벽 너머 지안의 방은 조용했다. 편의점 야간이라 침대는 비어 있을 것이다. 현관 쪽에서도 도어락 소리는 한동안 없었다. 윤재 씨는 아직 연구실인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오면 관리비 얘기부터 꺼낼 작정이었는데, 오늘은 그 일정도 미뤄졌다.

부엌에는 태오가 있었다. 흰 조리복 윗도리를 입고 식탁 의자에 앉아 운동화 끈을 묶는 중이었다. 가스레인지 위 주전자에서 물이 막 끓기 시작했다.

"어, 소율 씨. 아직 안 잤어요?"

"이제 끝났어요 방금"

"커피 내려요?"

"네 한 잔만요"

소율은 싱크대 옆 서랍에서 필터를 꺼내다가 안경을 올려 썼다. 렌즈 너머로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3시 4분. 오늘 오전 중으로 메일이 온다고 했으니 아직 여섯 시간쯤 남았다. 어쩌면 그보다 일찍 올 수도 있었다. 수신함을 열어 본 게 이십 분 전이었고, 그 전에는 십 분 전이었다.

"얼굴이 하얘요" 태오가 끈을 당기며 말했다. "밥은요?"

"공용 칸 빵 먹었어요"

"그게 밥은 아니죠"

"탄수화물이에요"

태오가 웃더니 일어나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름표가 붙은 칸 중 하나에서 반투명 통을 꺼내 식탁에 올렸다. 뚜껑 위에 '태오'라고 쓰인 이름표 옆에 작은 밀 이삭이 그려져 있었다. 소율이 3년 전 밤에 그려 준 것이었다.

"어제 남은 거 싸 온 건데, 키슈예요. 데워 먹어요"

"아 네 네"

"이름표 없으니까 오늘은 소율 씨 칸에 넣어 둘게요"

"제 칸은 김치밖에 없는데"

"그럼 김치 옆에요"

소율은 드립 포트를 쥔 채로 잠깐 웃었다. 커피 가루 위에 물이 동그랗게 퍼지며 향이 올라왔다. 태오는 가방을 어깨에 걸고 현관 쪽을 한 번 보더니, 신발장 위 택배 상자들을 슬쩍 훑었다.

"저 파란 비닐은 아직도 주인 없어요?"

"오늘까지만이에요 내일 노을로그에 올릴 거예요"

"송장 확인했어요?"

"...했어요 아무 이상 없어요"

"역시 범죄 다큐 번역가"

"그거랑은 상관없거든요"

대답하면서도 소율의 시선은 주머니 속 휴대폰으로 갔다. 태오는 그걸 봤지만 묻지 않았다. 신발을 신고 도어락 덮개를 올리며 말했다.

"오늘 뭐 있죠? 아까부터 계속 폰 만지길래"

"아니에요 마감이요"

"마감은 끝났다면서요"

"...또 다른 마감이요"

태오는 잠시 소율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마감도 잘 끝나길 바랄게요. 키슈 꼭 데워 먹어요. 전자레인지 1분 30초"

"네 다녀오세요"

삐, 삐삐. 도어락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벽 너머에서 울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소율은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 있다가, 식탁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다. 혀끝이 얼얼했다.

키슈를 접시에 옮겨 전자레인지에 넣고 1분 30초를 눌렀다. 돌아가는 접시 불빛을 보며 휴대폰을 꺼냈다. 수신함은 비어 있었다. 아래로 당겼다. 여전히 비어 있었다.

전자레인지가 땡 하고 울렸다.

그와 동시에 손바닥 안에서 휴대폰이 짧게 떨었다. 화면 맨 위에 알림이 내려왔다.

[배급사 번역팀] 번역가 선정 테스트 결과 안내

소율은 키슈 접시를 꺼내지도 못한 채 엄지를 화면 위에 올렸다. 부엌의 형광등이 낮게 웅웅거렸다. 제목은 열두 자였고, 본문은 아직 열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 열두 시

메일 본문은 세 문단이었다. 소율은 첫 문단에서 합격이라는 글자를 찾았고, 두 번째 문단에서 찾는 걸 포기했고, 세 번째 문단에서 '오늘 24:00 마감'을 읽었다. 2차 테스트. 극장 개봉작 한 릴. 첨부 파일 용량은 4.2기가였다.

1층에서는 받아지지 않을 크기였다.

키슈는 식어서 접시 위에서 굳어 있었다. 반쯤 먹다가 포크를 내려놓았고, 노트북을 안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잠깐만 눈을 감았다가 일어나서 계단 일곱 번째 칸으로 가자고 생각했다. 안경도 벗지 않고 옆으로 쓰러졌다.

눈을 뜨자 창호지색 빛이 커튼 사이로 들어와 있었다. 열 시 십 분. 발을 내리다가 소율은 움찔했다. 방바닥이 얼음장 같았다. 양말을 신었는데도 발바닥부터 종아리까지 냉기가 타고 올라왔다. 손등으로 벽을 짚어 보았다. 벽도 차가웠다.

욕실로 가서 온수 쪽으로 돌렸다. 처음엔 찬물이 나왔고, 한참 흘려보내도 미지근해지지 않았다. 보일러실 문을 열었다. 계기판의 작은 불은 꺼져 있었고 'E' 뒤로 숫자 두 개가 깜빡이다 사라졌다. 소율은 그 앞에 서서 입김이 나오는지 확인했다.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발장 위 파란 비닐은 그대로였다. 보리의 슬리퍼는 없었고, 도어락 소리가 한 번도 못 들린 걸 보면 윤재 씨는 연구실에서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오늘 정산 얘기는 또 못 한다.

방으로 돌아와 휴대폰에 보일러 기사님 번호를 띄웠다. 저장명은 '보일러 김사장님'. 통화 버튼 위에서 엄지가 멈췄다. 사흘 전에도 이 화면이었다. 그 전에는 문자를 보냈지만 '전화 주세요'라는 답만 왔다.

신호음이 한 번 울리자마자 끊었다.

"...아니야 아니야"

노트북을 열었다. 마감 열네 시간 남짓. 한 릴이면 이십 분 안팎이고, 대사 밀도에 따라 여덟 시간은 걸린다. 파일은 받아야 하는데 여기선 안 받아진다. 연남동까지 03번을 타고 가면 편도 이십오 분. 보일러는 그동안 멈춰 있다. 보일러 고치는 일과 번역 중 하나를 고르라면 번역이었다. 그런데 고르라는 사람이 없었다.

소율은 노을로그를 열었다.

보일러 멈췄어요 온수 안 나와요 기사님 연락은 오늘 안에 합니다 (진짜로)

올리고 나서 마지막 줄을 한참 쳐다봤다. 같은 문장을 사흘 전에도 썼다. 지우려다가 그냥 두었다.

손목 보호대를 집어 들었다. 오른손에 감으며 이로 벨크로를 물어 당겼다. 헤드폰, 에너지 드링크 세 캔, 충전기 두 개. 가방에 하나씩 넣다가 책상 모서리에 붙여 둔 메모지가 눈에 걸렸다. 오늘의 일정이라고 적어 놓은 건 '25일 정산 D-4'뿐이었다.

방문을 나서는데 현관 쪽에서 삐, 삐삐 소리가 났다. 소율은 신발끈에 손을 뻗은 채 멈췄다. 도어락 소리의 간격이 느리고 무거웠다. 윤재 씨 소리였다.

문이 열리고, 눈 밑이 어두운 남자가 가방을 끌며 들어오다가 소율과 눈이 마주쳤다.

"아. 소율 씨. 집이 왜 이렇게 추워요?"

소율은 가방끈을 어깨에 고쳐 메고 천천히 일어났다. 안경을 올렸다.

"윤재 씨 마침 잘 오셨어요"

"네?"

"전화 하나만 대신 걸어 주실 수 있어요?"

계단 일곱 번째 칸

윤재는 가방을 현관 바닥에 내려놓지도 못한 채 소율을 쳐다보았다. 외투 깃에 밤공기가 아직 묻어 있었다.

"전화요? 무슨 전화요"

"보일러 기사님이요 온수가 안 나오고 계기판에 E 뜨고 숫자가 깜빡여요"

"아, 그거면 제가 걸게요. 걸죠. 당연히 걸죠"

너무 빨랐다. 소율은 그 속도를 글자 수처럼 세어 보았다. 윤재는 신발을 벗으며 휴대폰을 꺼내더니, 그 화면을 소율 쪽으로 보이지 않게 기울였다.

"번호 불러 주세요. 아니, 소율 씨 폰으로 걸어야 하나? 기사님이 이 집 번호를 아실 테니까"

"제 폰으로 걸면 제가 받게 되잖아요"

"그렇죠. 그러네요"

"그래서 윤재 씨 폰으로 걸어 달라는 거예요 번호는 보낼게요"

소율은 '보일러 김사장님' 번호를 문자로 보냈다. 윤재의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울렸다. 그는 확인하지 않고 거실로 들어가 소파 팔걸이에 외투를 걸쳤다. 입김이 하얗게 나왔다.

"진짜 춥네. 이 정도면 어젯밤부터 꺼진 거 아니에요? 나 연구실에서 히터 틀고 있어서 몰랐네"

"어젯밤 몇 시에 오셨어요"

"안 왔어요. 지금 왔죠"

"알아요 도어락 소리 안 났거든요"

윤재가 웃었다. 소율은 웃지 않았다. 윤재는 주방으로 가 주전자를 들고 물을 받으며 등을 돌린 채 말했다.

"통화는 이것만 마시고 바로 할게요. 공복에 전화하면 목소리가 갈라져서 기사님이 못 알아들으셔요"

"기사님은 알아들으세요"

"그리고 소율 씨, 오늘 날짜가 며칠이죠. 21일? 와, 이번 달 진짜 빠르다"

"22일이에요"

"그렇구나"

그 '그렇구나'가 주전자 물소리에 섞여 들어갔다. 소율은 가방끈을 두 손으로 쥐었다. 25일 얘기를 꺼내려고 입을 열었다가, 4.2기가를 생각하고 닫았다. 마감까지 열세 시간 사십 분이었다. 윤재의 칠십이만 원 중 어느 쪽이 먼저 급한지는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오늘만큼은.

"점심 전까지요"

"네?"

"기사님 전화는 점심 전까지 부탁드려요 통화 끝나면 노을로그에 한 줄 남겨 주시고요"

"예, 예. 맞아요, 그런 건 제가 또 잘하죠"

"그리고 윤재 씨"

"네"

"밥은 드셨어요"

윤재가 돌아봤다. 눈이 잠깐 풀렸다.

"...아직요"

"냉장고 공용 칸에 키슈 있어요 태오 씨가 두고 간 건데 제 칸에 넣어 놨어요 데워서 드세요 전자레인지 1분 30초"

"소율 씨 건 아니고요?"

"반쯤 먹었어요 나머지 드세요"

윤재는 뭐라고 말하려다 그만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율은 현관에서 운동화에 발을 넣었다가 다시 뺐다. 이 추위에 밖으로 나가 03번을 타는 건 무리였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가슴에 안았다.

"어디 가요?"

"계단이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열네 칸이었다. 소율은 일곱 번째 칸에서 멈춰 쭈그리고 앉았다. 나무 계단의 냉기가 트레이닝복 바지를 뚫고 올라왔다. 갈색 카디건 소매를 손등까지 끌어내리고 노트북을 무릎에 올렸다. 와이파이 아이콘이 깜빡이다가 두 칸으로 올라갔다.

다운로드 창에 파일명이 떴다. 예상 시간 47분.

소율은 헤드폰을 목에 걸어 두고 아래층 소리에 귀를 열어 두었다. 주전자 소리가 멎고, 전자레인지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1분 30초. 그리고 윤재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 사장님, 저 솔뫼동 노을하우스인데요..."

소율은 손가락을 멈췄다. 다음 문장이 들릴 때까지 숨을 참았다.

"...어, 아뇨. 아뇨, 그 집 말고요. 죄송합니다, 잘못 걸었네요"

통화가 끊겼다. 잠시 뒤 윤재가 계단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손에는 접시 대신 휴대폰만 들려 있었다.

"소율 씨, 그 번호요. 혹시 지난번 번호 아니에요? 이거 김사장님 번호가 아니라는데"

소율은 다운로드 바를 내려다보았다. 이 퍼센트에서 사 퍼센트로 넘어가고 있었다.

"...네?"

열한 시의 두 칸

계단 일곱 번째 칸에서 소율은 엉덩이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노트북 하단 시계가 23:02로 넘어갔다. 헤드폰 안에서는 같은 대사가 세 번째 재생되고 있었다.

오후 네 시쯤 온수가 돌아왔다. 윤재가 어디선가 진짜 김사장님 번호를 찾아 통화했고, 기사님이 와서 십오 분 만에 고쳤다고 했다. 소율은 그 십오 분 동안 계단 위에서 일곱 번째 칸의 남은 문장만 쳐다봤다. 고맙다는 말은 현관 쪽으로 대충 던졌다. 아 네 네,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그 뒤로 일곱 시간 동안 에너지 드링크 두 캔이 비었다.

자막 창에는 마지막 줄이 떠 있었다.

"We don't get to choose what we keep."

글자 수는 서른한 자까지 줄였는데 한 줄에 안 들어갔다. 소율은 입술을 깨물고 커서를 앞뒤로 움직였다. 간직할 걸 고를 수 없다. 우리는 간직할 걸 고르지 못해. 둘 다 길었다.

위에서 문이 열렸다. 2층 끝 방 쪽이었다. 맨발이 마룻바닥을 밟는 소리가 가볍게 났고, 난간 너머로 보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쓰고 한 손에 충전기를 쥔 채였다.

"언니, 아직도 거기예요?"

소율은 헤드폰 한쪽을 벗었다.

"어 아직"

"아침에 내려가다 봤는데 그 자세 그대로예요. 화석 되는 줄"

"마감이야 열두 시"

"열두 시요? 한 시간 남았네"

보리는 계단을 두 칸 내려와 앉았다. 소율보다 위, 아홉 번째 칸이었다. 너무 가까웠고, 소율은 노트북 화면을 슬쩍 기울였다. 보리는 그걸 봤지만 못 본 척하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내 방 와이파이 되게 잘 터지는데"

"알아"

"와서 하세요. 책상 쓰고, 나 침대에서 폰만 할게요. 말 안 걸게요"

"그러면 네가 불편하잖아"

"안 불편한데"

"11시 넘었는데 너 내일 수업 없어?"

"...있어요 1교시"

"그럼 자야지"

"언니도 잔소리 끝에 밥 묻는 거 알아요? 오늘은 안 물어보네"

소율은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물어볼 타이밍을 놓친 건 맞았다. 속이 비어 있다는 건 키슈 반 조각 이후로 아무것도 안 넣었다는 얘기고, 그게 보리한테 들켰다는 얘기였다.

"밥 먹었어?"

"저녁에 라면이요. 언니는요?"

"...탄수화물 먹었어"

보리가 웃음을 눌렀다. 어깨가 들썩였다. 그러다 갑자기 진지해진 얼굴로 난간 사이 틈을 쳐다보았다.

"언니, 이거 되게 중요한 거예요?"

"뭐가"

"오늘 마감. 하루 종일 그 칸에서 안 움직였잖아요. 윤재 오빠가 보일러 기사님 전화번호 두 번 틀렸을 때도 안 일어났고"

소율은 노트북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다운로드 폴더에는 4.2기가짜리 파일이 있었고, 자막 파일은 마지막 줄 하나만 비어 있었다. 중요하냐고 물으면 중요하다고 해야 하는데,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그냥 일이야"

"그냥 일은 그렇게 안 쳐다봐요"

"너 뭐 있어? 자정 전에 나 방해하러 온 거야?"

말이 튀어나오고 나서야 어조가 날카로웠다는 걸 알았다. 보리는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모자 끈을 만지작거렸다.

"아니요. 충전기 빌리러 나왔다가요"

"충전기 들고 있잖아"

"...그러게요"

보리가 일어났다. 계단이 삐걱거렸다. 소율은 헤드폰을 다시 쓰려던 손을 멈췄다.

"보리야"

"네"

"미안 방금 그건 내가 말이 셌어"

"괜찮아요. 근데 언니"

보리는 올라가다 말고 몸을 돌렸다. 난간을 붙잡은 손가락 끝이 하얬다.

"그 마지막 줄이요. 아까 저 내려가다 화면 봤는데 '간직할 걸 고를 수 없다'보다 '남는 건 고를 수 없어'가 더 짧지 않아요?"

소율은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글자를 세었다. 열한 자, 공백 포함 열세 자. 한 줄에 들어갔다.

"...어"

"제가 번역을 아는 건 아닌데요. 그냥 말하면서 그게 더 입에 붙어서"

소율은 대답하지 못하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커서가 깜빡였다. 23:09. 보리의 발소리가 위로 올라가다가 멈췄고, 문 닫히는 소리 대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옥탑방 계약서요. 오늘 낮에 현관 신발장 위에서 봤는데 이름란이 비어 있던데, 그거 누구예요?"

소율의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굳었다.

전송 완료, 새벽 세 시

"아직 아무도 아니야"

소율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한 줄에 들어가는 길이였다.

"곧 누가 올 거고"

"곧이 언제예요?"

"곧이 곧이지"

위에서 보리가 뭐라고 하려다 말았다. 발소리가 두 걸음 올라가다 멈췄고, 이번에는 문이 닫혔다. 계단통이 조용해졌다. 계약서 이름란이 비어 있다는 건 소율도 알았다. 누구 이름을 쓸지 몰라서가 아니라, 쓰고 나면 정말로 누가 오는 게 되는 것 같아서 비워 둔 칸이었다.

소율은 고개를 흔들고 커서를 마지막 줄로 돌렸다.

"남는 건 고를 수 없어"

지우고 다시 쳤다. 입으로 한 번 읽었다. 열세 자. 밋밋하지도 않았다. 이 대사가 나오는 장면에서 주인공은 상자를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가 맞았다.

23:31. 전체 검수는 이십 분 남짓이면 될 줄 알았는데, 앞쪽 릴에서 줄 바꿈이 어긋난 곳이 네 군데 나왔다. 소율은 헤드폰을 쓰고 처음부터 다시 틀었다. 에너지 드링크 마지막 캔을 땄다. 칙, 소리가 계단통에 크게 울렸다. 아래층 거실에서 TV 소리가 꺼졌다. 누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지, 문 닫는 소리가 차례로 났다. 소율은 소리로 세었다. 윤재 씨, 그리고 윤재 씨의 슬리퍼.

23:48. 손목이 보호대 안에서 맥박처럼 뛰었다. 소율은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한 번 쥐었다 놓았다.

23:53. 에이전시 포털에 접속했다. 와이파이가 두 칸에서 한 칸으로 떨어졌다. 아이콘이 깜빡였다.

"안 돼 안 돼 안 돼"

노트북을 들고 계단 한 칸 위로 올랐다. 여덟 번째 칸. 두 칸이 돌아왔다. 업로드 창에 자막 파일을 끌어다 놓자 막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3퍼센트. 11퍼센트. 파일은 겨우 이백 킬로바이트였는데도 막대는 느렸다. 소율은 숨을 반쯤만 쉬었다.

23:58. 67퍼센트에서 막대가 멈췄다.

소율은 노트북을 두 손으로 받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기울이면 신호가 끊길 것 같았다. 목이 말랐고, 말라서 침을 삼켰고, 그 소리가 귀에 크게 들렸다.

막대가 움직였다. 100퍼센트.

'제출이 완료되었습니다. 제출 시각 23:59:12.'

한참 화면을 보다가 소율은 노트북을 덮었다. 덮고 나서야 팔이 떨리는 걸 알았다. 계단에 이마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나무의 냉기가 이마에 닿았다. 결과는 이 주 뒤라고 했다. 이 주면 이달 말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방으로 내려가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앉았다. 눕지는 않았다. 누우면 정말 끝나 버릴 것 같았다. 휴대폰으로 노을로그를 열어 쓰다 지웠다. 쓰다 지웠다. 결국 한 줄만 올렸다.

보일러 고쳐졌어요 (윤재 씨 감사) 택배 파란 비닐 내일 공용 칸 이관 (마감 끝)

올리고 나니 새벽 한 시였다. 눈이 감겼다가 떠졌고, 다시 떠 보니 깜깜한 방에서 모니터 대기 불빛만 껌뻑였다. 손목을 보니 보호대가 그대로였다. 휴대폰은 두 시 사십 분.

배가 비어 있었다. 소리가 날 정도로.

부엌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소율이 문턱을 넘자 커피 향이 먼저 왔다. 태오가 조리복 윗도리 단추를 채우며 드립 포트를 들고 있다가 돌아봤다.

"어. 소율 씨 또 새벽이에요?"

"이번엔 잤어요 한 시간"

"그건 자는 게 아니라 기절이에요"

소율은 식탁 의자에 앉았다.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 위로 카디건 소매가 손등을 덮었다. 태오는 말없이 머그잔을 하나 더 꺼냈다. 커피가 두 잔으로 나뉘어 떨어졌다.

"마감 끝났어요?"

"네 방금요 아니 열두 시에요"

"그 또 다른 마감?"

"...네"

태오가 잔을 앞에 내려놓았다. 소율은 두 손으로 감쌌다. 뜨거움이 손바닥에서 팔로 올라왔다. 태오는 선 채로 자기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더니 냉장고를 열었다.

"키슈는 윤재 씨가 먹었더라고요. 칸에 빈 통만 있어서. 대신 이거"

작은 종이봉투를 식탁에 올렸다. 아직 따뜻했다. 열어 보니 소보로빵이 하나 들어 있었다. 전날 아침빵집에서 남은 게 아니라, 이 새벽에 막 구운 냄새가 났다.

"이거 언제..."

"어제 쉬는 날이라 집에서 구웠어요. 이름표 안 붙였으니까 공용이에요. 먹었다고 말만 해요"

"먹었다고 말할게요"

"노을로그에요"

"네 네"

태오가 웃었다.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으며 돌아봤다.

"결과 나오면 말해 줘요. 잘 됐으면 케이크 구울게요. 안 됐으면..."

"안 됐으면요?"

"더 큰 케이크"

도어락이 삐, 삐삐 울렸다. 문이 닫히고 계단 아래로 발소리가 내려갔다. 소율은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버터 맛이 입 안에 번졌다. 씹다가 문득 멈췄다.

이 주. 아니, 이 주도 안 남은 이달 말. 그리고 25일, 이틀 뒤.

윤재 씨의 칠십이만 원이 먼저 떠올랐다. 소율은 남은 빵을 마저 입에 넣고 휴대폰을 집었다. 노을로그 새 글 쓰기 창에 커서가 깜빡였다.

25일 정산 공지 1)

번호만 치고, 소율은 한참 다음 줄을 쓰지 못했다. 현관 벽 너머로 아직 오지 않은 누군가의 도어락 소리를 기다리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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